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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삶, 완벽한 분리는 가능할까? [세브란스 : 단절 (Severance), 애플TV 드라마]Film/TV Series 2023. 6. 4. 23:53728x90반응형
# '나'를 잊는 것에 익숙해졌다.
짧다면 짧을 수 있고, 길다면 길 수 있는 36년을 살아오면서 인생의 관문마다 숱하게 들었던 조언은 '나를 버리라'는 말이었다.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나 죽었다'라고 생각하고 공부만 하라는 말을 들었다. 운 좋게 입학한 대학도 다닌 지 2년이 안 될 무렵, 입영통지서를 받게 된다. 군 입대를 앞둔 나에게 선배들은 하나같이 '나를 버리고' 다녀오라고 했다. 1년 11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취업시장에서도 나를 지워야만 했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보다는 좀 더 가공된 모습을 자기소개서에 작성해야만 했고, 일명 '자소설'이라고 불려지는 Non-자기소개서를 수 백개의 회사 인사팀에 발송해야만 했다. 그렇게 외향적이지 않고, 실패를 누구보다 두려워하는 '나'는 세상 누구보다 붙임성 있고, 칠전팔기는 기본으로 장착된 가상의 인물이 되어, 진짜 '나'와 단절되어 살아왔다. (직장 생활도 '내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것은 매 한 가지다.)
사실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떼어놓고 살 수 없다. 별주부전의 토끼가 몸에 버젓이 달려있는 간을 뭍에 꺼내놓고 용궁에 내려왔다고 하는 것처럼, 나와 그대들을 속이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사회는 '나'와 분리되어 업무나 상황에 임하기를 강요한다. 사회라는 공적인 영역에 나(개인)의 생각과 마음이 침투할 공간은 없다. 뒤통수에 전원이 달린 듯, '나'를 On/Off 해야만 하는데, 그 행위에서 우리는 마음의 병이 시작되는 것이다.
Apple TV 세브란스 : 단절 (Severance), 2022년 2월 애플TV를 통해 방영된 시리즈물 # 잠시나마 '버티기 위해' 단절을 택한 마크
* 드라마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크는 자발적으로 '단절'을 선택한다. 여기서 단절(Serverance)은 대상자의 뇌 속에 장치를 삽입해서 특정 공간에 입장함과 동시에 기억을 분리하는 기술을 일컫는다. 마크가 입사한 '루먼'이라는 회사는 입사자에게 '단절'이라는 시술을 실행한다. 마크가 자발적으로 기억을 분리한 이유는 죽은 아내 때문이다. 아내의 상실을 24시간 떠올리는 마크에게 하루는 너무나 고통스럽다. 일에 몰두하는 9시간만큼은 아내를 떠올리는 행위를 멈추고 싶었기에, 마크는 회사 밖의 자아 (Outie, 아우티)와 회사 내부에서의 자아 (Innie, 이니)로 나뉜 '단절'의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끊어내고 싶은 삶의 아픈 기억을 위해 일상의 1/3을 도려냈지만, 단절된 외부와 내부의 자아는 서로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아우티 마크가 우연히 회사 밖에서 전 직장 동료를 만나며 루먼 회사에서 일하는 또 다른 나, 이니 마크를 궁금해한다. (당연히 마크는 직장 동료를 알아보지 못한다.)이니 마크도 다르지 않다. 직장 동료가 회사 외의 공간에서 이니로 변하면서, 아우티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직장 동료 아우티에게 아들이 있었고, 이니는 아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이름을 궁금해한다.) 그 순간 이니는 아우티의 삶에 접근하고 싶어 한다. 본인의 선택으로 직장과 일상의 자아를 분리했지만,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나를 궁금해하는 인간의 본성을 두 자아 모두 보유한 것이다.
Apple TV 세브란스 : 단절 (Severance), 마크가 속한 마이크로 데이터 정제소 팀원들의 모습 # 잘라내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
단절을 선택하며, 24시간 중 8시간만 살아가는 자아와 나머지 16시간을 살아내는 자아로 분리했다. 삶의 메인이라고 볼 수 있는 16시간짜리 아우티 마크의 모습보다 대체재로 8시간을 동떨어져 기억을 도려낼 용도로 생성된 이니 마크가 더 적극적으로 '나'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여 입구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 같은 사무실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는 마크의 모습은, 결국 단절을 선택하기 전 마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나 또한 그렇다. 그 누구보다 '워크 라이프 밸런스'를 지향하지만, 그렇지 못한다. 이직한 직장에서 불과 6개월을 지냈지만, 체감상 3년은 근무한 것 같다. 이렇게 일에 잠식될 것인가, 고민하던 내가 선택한 '단절'은 슬랙 어플의 알림 중단이다. 퇴근 후,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알람을 꺼놓거나 금요일 저녁 퇴근 후엔 월요일 아침에나 알람이 울리도록 알람을 꺼 버린다.
하지만 알람을 꺼 놓아도, 잠깐 틈이 생기면 앱을 실행시켜서 새로 올라온 글을 정독한다. 퇴근하며 같이 집에 돌아온 업무용 노트북을 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 것만 같아서 꾹 참아본다. 마크가 절단 시술로 삶의 8시간을 떼어놓으려 했던 것처럼, 나의 앱 푸시 알람 끄기는 나의 남은 16시간을 지키기 위한 단절 시술이다.
Apple TV 세브란스 : 단절 (Severance), 단절 시술 장면. 뇌의 한 부분에 칩을 이식하여 '나'를 두 개로 분리한다. 나를 두 개로 분리할 수 있을까? 분명하지만, <일을 하는 나>와 <삶을 사는 나>를 드라마처럼 분리할 수는 없다. 에세이 작가 김신지 씨의 저서 '평일도 인생이니까 : 주말만 기다리지 않는 삶'이란 책은 제목처럼 주말의 달콤함을 위해 평일의 쓴 맛을 참고 인내하는 요즘 나의 삶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유체이탈하듯, 영혼을 주말에 놓고 주 5일을 도려낸 듯 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에 잠식되어 삶 속의 나를 놓치고 사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 같다.
Apple TV 세브란스 : 단절 (Severance) 이 드라마를 보면서, 뇌 시술을 통한 자아 단절이란 공상 과학 드라마는 스릴러로 다가왔다. 특히나, 루먼을 배경으로 하는 씬(Scene)에서는 하얀 배경과 함께 자로 잰 듯한 좌우대칭의 구도가 '정갈함이 주는 공포'가 무엇인지 느끼게 했다. 시즌 1을 완독 하며, 마크의 단절 시술이 극 중에서처럼 비난받을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어찌 보면 단절일 수도 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나'를 찾으려는 간절함이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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